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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동포들 참상에 눈물 도산 안창호 시찰담

1927년 간도동포의 생활실태 큰 의미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8-08-22 (수) 04:39:09

 

Newsroh=노창현기자 newsroh@gmail.com


 

간도의 지리적 현황-1.jpg

   

 

“1927년도의 간도지방 답사는 도산의 위대한 면을 보여줍니다.”

 

미주흥사단 윤창희 위원장은 도산 안창로가 지금으로부터 91년전인 1927년 우리 민족의 땅 간도에 있는 동포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시찰담(視察談)에 대한 역사적 측면을 강조했다.

 

최근 ‘독서동맹 운동’을 통해 안창호의 재발견을 조명하고 있는 미주흥사단에 따르면 간도 시찰담은 도산이 1927년도에 간도에 거주한 한민족의 상황을 직접 보고 상해로 돌아와서 8월 16일 오후 8시에 프랑스의 관할 지역인 삼일당에서 시찰 보고를 한 것이다.

 

간도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만주 사이에 낀 땅이다. 이 땅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땅으로 한민족이 오랫동안 살았던 땅이었다. 일본은 간도를 청나라로 넘기고 만주에 괴뢰국을 창설하였다. 간도의 지리적 현황으로 보면, 이 땅이 수천년동안 한반도와 같은 운명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한민족은 간도 땅을 잃어 버렸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고 수많은 독립군 양성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국경을 여러 번 넘어 국내의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타격하였다. 일제는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을 사주하여 혼춘현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 시켰다. 일본군은 정규군 3개 사단, 25,000명에 달하는 막강한 관동군 병력을 동원하였다.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오히려 독립군에게 패하자 이에 보복으로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은 확인된 수만 해도 3,500 여명에 이르지만 3~4개월에 걸쳐 만행이 자행된 숫자를 합치면 피해 조선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러시아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蠻行)을 자행하였다.

안창호1.jpg




 

도산이 간도를 방문한 1927년도는 간도참사가 일어난지 약 6, 7년 정도 지난 후의 일이었다. 도산이 본 간도 지역의 동포들의 참상(慘狀)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현대말로 표현하자면 나라없는 피난민(refugee) 신세이었다. 현재 시리아, 리비아 같은 내전을 겪는 피난민들과 그 참상이 비슷하다.

 

도산은 간도지역의 동포들의 생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루 세끼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이 부족한 동포들의 생활을 보았고, 이 처참한 환경을 1927년 8월 16일에 상해에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당시 피난민 신세의 한민족은 의식주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도산은 가슴이 메어져서 연설이 중단되곤 하였다. 간도 지역의 동포들은 정착하여 살만하면, 빚만 늘어가는 삶이었다. 빚도 장리 빚이었다. 지금의 고리대금이다. 한해가 지나면 다음 해에는 빚이 두배로 불어나는 장리 빚이다. 중국인의 차별, 일본인의 이간질 등으로 한민족은 설 땅이 없어졌다.이것이 일본이 원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후방기지를 철저히 파괴한 것이었다. 무장 투쟁의 근원지를 없앤 것이었다. (꼬리뉴스 참조 안도산의 시찰담)

윤창희 미주흥사단 위원장은 “도산을 흔히 실력양성론가 혹은 교육독립운동가로 좁은 의미의 인물로 묘사하는 데 그렇지 않다. 도산은 항상 일본과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해야한다고 믿었다”고 밝혔다.

 

당시에 도산은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로 추대됐다. 간도 지역의 시찰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1907년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의 대표적인 사업이 무장투쟁이었다. 실제로 도산은 신민회 시절 망명하였을 적인 1909년도에 만주와 시베리아 근처에 무장독립운동을 할 거점을 두루 살펴보았다.

 

윤창희 위원장은 “1927년도의 간도지방 답사는 도산의 위대한 면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도산은 책상에 앉아서 독립운동을 지휘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백성의 생활로 들어갔다. 1917년 1918년도의 도산이 멕시코를 방문하여 약 10개월 동안 동포들과 생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도산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생활을 챙겼다. 1905년도의 공립협회도 마찬가지이다.

 

윤창희 위원장은 “8월 16일은 도산이 상해 삼일당에서 1927년 8월 16일에 연설한지 꼭 91년째 되는 날이다. 이날 도산은 백성들의 삶과 고통을 이야기 하면서 울었다. 당시에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으로 독립운동 중에서도 이론 및 사상 투쟁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모양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도산은 분열을 경고하였다. 지금의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분열과 똑 같다. 도산은 이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생활로, 자신을 본보기로, 실천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행동하다 보니, 도산의 생각과 말들이 사상이 되고 철학이 된 것이다. 그는 백성과 항상 함께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도산이다”라고 강조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꼬리뉴스>

 

간도 동포의 생활실태 (1927. 8. 16.)

- 안도산의 시찰담 -

이는 지난 8 월 16 일 오후 8 시에 상해 법계 삼일당에서 열린 도산 안선생 환영회

석상에서 선생이 친히 보시고 온 것을 보고한 것임.

간단히 간도에서 얻은 감상을 말씀하겠습니다. 내가 가서 본즉 가기 전에 생각하던 것보다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첫째 생활상태가 어떠할까? 무명으로 만든 조선옷을 빨지도 못하고 입은 이가 많고 상투 있는 사람도 있으며 백립 쓴 사람도 있는데 1 개월 삭료는 2,3 원에 불과합니다. 서슥밥에 토장을 먹는데 토장이란 것은 생메주를 소금에 끓인 것입니다. 가옥들은 어떠한가? 내가 가기 전에는 생각하기를 간도에 우리 사람이 몇 만 호가 있다하나 한 호가 적어도 집 한 채씩은 가지고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 집들은 조그만씩한 초가인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남편 온돌과 북편 온돌이 있습니다. 거개 한 호가 한 온돌에 삽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한 온돌의 중간을 치마로 막아 치고 그 한편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혹시는 한 온돌 중간을 수수대로 막고 한편에 한호씩 두호씩 사는 것도 보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집에 손님이 왔는데 밤에 주인 여자가 울매 남편이 울고 손님도 따라 울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운 원인은 소금도 없어 나물도 먹을 수 없다는 처참한 일이라고 합디다. 그러면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경제 압박에 살 수 없어서 만주에 건너와 토지를 얻으나 무엇을 먹고 농사 지을 수 없는 고로 지주에게 일 년 먹을 양식까지 빌게 됩니다. 꾸어 먹을 때는 서슥쌀이지만 갚을 때에는 쌀로 줍니다. 그래서 장리로 갚습니다. 게다가 술까지도 중국인이 가을에 곡식 받기로 하고 외상을 줍니다. 그래서 가을에 추수하여 갚을 것 다 갚고 보면 도로 먹을 것이 없게 됩니다. 그렇게 한 지방에 한 3 년씩 있어 보아도 별 효험이 없으매 다른데 좀 나은가 하고 이사합니다. 이사하는 것도 어디에 거처를

청해놓고 가는 것이 아니고 그저 정처없이 가다가 저물면 자고 어떤 산골이나 파먹을만한 곳을 만나면 거기에 머무릅니다. 길림 부근에서 이러한 광경을 날마다 얼마큼 보았는데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어떻게 하면 동포들로 하여금 이 고해를 벗어나게 할까?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터지는 듯......

 

그 다음 지식 문제, 그들은 들에 있다 산에 있다 들어와서 세상 소식도 모르고 신문도 보지 못합니다. 아들 가르치는 것도 여기저기 사나마 몇 호가 있는 산골에서 조그만한 초가를 얻어 한데 모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사가 극히 귀합니다. 교사 주는 것이 박한고로 누구나 좀 똑똑한 사람은 그런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즉 자연 가르친다는 것도 잘 가르치지 못하게 됩니다. 그나마도 외따로 사는 사람은 못 가르칩니다. 이러한데다 중국 관인들이 학교문을 봉하는 일을 종종 합니다. 그런데 간도 동포들의 고해생활은 앞으로 더욱 심하여서 조밥도 먹지 못하게 되겠다고 염려합니다. 작년도 중국관청에서 발표한 통계표에 보면 직예와 산동에서 남북만주로 넘어온 빈민이 4 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중국인의 산업은 간도 방면으로 점점 늘어 나갑니다. 전에 무료로 빌리던 땅으로 차차 소작료를 받게 되어서 처음에 열 단에 두 단을 지주에게 주던 것이 지금은 차차 늘어서 열에 여섯 단을 지주에게 주고 본즉 반작도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은 땅 얻기가 매우 힘듭니다. 중국 빈민이 많이 모여든 고로 모든 리 있는 것은 자연 그네의 수중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중국인의 멸시와 학대가 날로 심하여 갑니다. 나도 몇 차례 차 안에서 나의 앉은 자리를 빼앗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말하는 것과 행동은 일인의 학대보다 더욱 심합니다. 그래서 간도 동포들의 생활 정형은 오직 고해 중에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다음 독립운동자들은 어떠한가? 본즉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8, 9 월에 솜옷 한 벌 입으면 그 이듬해 3 월에 벗습니다. 빨아 입지 못하여서 더러운 것은 고사하고 이가 많아서 같이 거처한즉 이가 물어 괴로운 것이 옥에 갇힌 괴로움보다 더합디다. 독립군들도 먹는 것이 없어서 곤란함이 막심합니다. 그러나 정의부에서는 독립군이 구차한 백성의 밥을 거저 먹을 수 없다 하여 밥 반상 값을 내라는 규칙을 정하였는데 그럼으로 그들의 별명을 반상값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독립군 중에 시비될만한 재료도 있지마는 그들은 의복을 한번 입으면 벗어서 빨 수 없어 그대로 떨어지고 말게 되는 곤란으로 지냅니다. 사실 그네들은 조밥에 토장으로 난처합니다. 이것을 볼 때에 불쌍한 동정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인도자들로 말하면 실로 성의 있게 합니다. 그러나 편당이 있어서 갑이 을을 미워하고 을이 갑을 미워하는 고로 1, 2 인이 잘못함만 있어도 그 잘못을 전체에 들리는 일이 많습니다. 근자에는 조선과 아령에서 넘어온 신진 청년들도 많아서 우리의 운동은 군중화하여야 한다고 떠드나 그네들도 역시 경제가 곤란하여 솜바지 한 벌을 입으면 1 년 내내 벗지 못하고 2,3 월에 가서 벗게 됩니다. 그러므로 민중화 그것도 역시 알고 못하게 됩니다. 전체로 만주 동포는 고통중에 있다 합니다. 이만 그칩니다.

 

〔그 나머지 선생의 얻은 감상의 말씀의 대지는 아래와 같음〕

오늘날 우리의 혁명운동자들은 우리의 운동이 그 정궤 앓은 것을 깨달은 줄 안다. 사방에서 떠드는 것은 곧 우리의 운동은 정궤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정궤가 무엇인가? 정궤보다도 정궤로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가? 그보다도 우리가 끌어 나갈 혁명이 무엇인가? 혁명은 불평을 받는 자가 불평 주는 자를 대항하는 적극 행위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에게 불평을 주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국가가 없으매 황족이 백성을 압박하는 불평도 없고 대자본가가 없으매 지주가 소작인 또는 공창 주인이 공인들을 압박하는 불평도 없다. 우리에게 불평을 주는 자는 오직 하나이니 곧 일본 제국이다. 그런즉 우리의 그 불평을 반항하는 행위 즉 혁명은 러시아의 혁명이나 중국혁명과 같지 않다. 우리는 러시아처럼 황실도 없고 중국처럼 군벌도 없다. 민족주의자의 방향도 일본의 국가이오 사회주의자의 방향도 일본 국가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은 전체적으로 일본을 대항하는 궤도에 들어설 것이오 그 궤도는 정궤이며 민족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하는 분별이 혁명운동계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운동은 성공될 희망이 앞에 있다고 한다.(상해에서)

* 이 자료는 <新韓民報>(1927.10.27)에 게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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